52卷26冊,目錄2卷1冊(合27冊) : 四周雙邊 半郭 21.3 x 16.3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2 x 21.3 cm.
조선 중기의 이며 학자인 이상정의 시문집이다. 고조할아버지는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증조할아버지는 이효제(李孝濟), 할아버지는 이석관(李碩觀), 아버지는이태화(李泰和), 어머니 는 재령 이씨로 밀암 이재의 딸이다. 고조부 이홍조가 광해군 때 외조부인 서애류성룡이 있는안동으로 피신해 오면서 그 후손들이 안동에 세거하게 되었다.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총명해서 5세 때 글자를 배웠는데 이때 벌써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을 다 알고 구별 했다고 한다. 6세 때 어머니상을 당하였는데 그슬퍼하는 모습이 마치 어른 같았다고 한다.
윤리에 독실하여 자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며 혹시라도 어기는 일이 없었고, 동년배들에대해 서도 낯빛을 바꾸거나 모진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또 율려(律呂 ; 음악), 역법(曆法), 산수(算數)에 모두 통달했으며, 선기옥형(璇璣玉衡 ; 혼천의), 심의(深衣), 상복(喪服) 등의 제도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고도 바로 손 가는 대로 만들어 내어 늘 스승인 이재의 칭찬을 받 았다.
1735(영조11)년에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전적,병조정랑, 사간원정언, 사헌부감찰, 병조참지, 예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외관직으로는 연일현감, 강령현감(康翎縣監) 등을지냈다. 이상정의 치적으로는 1753(영조 29)년 연일현감 재임 시, 연일은 풍속이 교화 되지 않아 현민이소송을 일삼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이었으나 이상정의 노력으로 한 때라 도 아이와 여자들이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또 연일현감 부임 당시 연일은 날이 가물어 민심 이 어지러웠으나 부임하자마자 비가 내려 현민들이 그 비를 사군우(使君雨)라 불렀다 한다.
1780(정조4)년 병조의 낭관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자 다시 예조참의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에는 형조참의에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이와 병을 이유로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1781년 향년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정은 퇴계 학맥의 중요한 계승자인 이재의 외손으 로 일찍부터그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이황 - 이현일 - 이재로 이어지는영남학파의 학통 을 계승하였으며 남한조, 김종덕, 류장원등에게 전수하였다. 이재의 문하에서는 김익한(金瀷 漢), 권정택(權正宅), 김낙행등과 교유하였다. 20대부터 고향의 문중 부로들이 자제들의 교육 을 위해 세운 대산서당(大山書堂)에서 학문에 잠심하여 후학을 가르쳤다. 가난하여 나물밥 끼니조차 잇기 힘들었으나 오롯이 학문과 교육에 힘써서 때론 달 밝은 밤에 혼자 못가에 앉아명상을 즐기고 때로 심신이 피곤하면 정관대를 거닐면서 성령(性靈)을도야하였다. 당시 이상정은 30세가 못 되었으나 그 명성이널리 퍼져 원근에서 배움을 청하기 위하여 찾아 오는 선비들이 날로 늘어났다. 이상정은 학문함에 있어공부를 정밀하게 하는 것을 중시하였 다. 평소 새벽에 일어나 머리 빗고 세수하고 먼저 가묘(家廟)에 참배하고 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독서는 공맹정주(孔孟程朱)의글을 주로 하였고 때론 밤 새워 사색하고 혹은 여러 날을 침잠하여 반드시 깨우친 뒤에야 그쳤으며 마음에 체득한 바는 반드시 몸으로 행하였다. 남의 허물은 못 들은 체 했고 남의 착한 행실을 들으면 반드시 칭찬하였다. 벼슬길에서물러 나와 다시 서재의 문을 열자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제자를 가르침에 있어서그 자질에 따라 함양했으며 심술(心術)을 밝혀 기질을 변화시키는데 주력하였다. 당시 영남의 선비로 언행이 겸손하고 공경스러우며 눈매가 단정한 이는 묻지 않아도 대산문인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상정은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주리설(主理說)을확립하였 다. 이(理)는무력한 정지체가 아니요, 스스로 능히 발하여 운용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고 하여 이(理)의운동성을 인정하였다. 즉, 이는 비록 기(氣)를 타고 동정(動靜)하나 그 발휘운용 (發揮運用)하는묘가 있어 하지 않음으로서 행하니 진실로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주재하지 않더라도 주재하는 바가 있으니 아주 주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기는 이(理)가동정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資]이 된다고 보았다. 이상정의 이기설은 이(理)의능동 성을 부정한 율곡의 주기설(主氣說)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갖는다. 저술로 『이기휘편(理氣彙 編)』, 『사칠설(四七說)』, 『제양록(制養錄)』,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등이 있으며, 25세 때의 시권(試券)도 전해진다. 1816(순조 16)년이조참판에, 1882(고종 19)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910년 문경(文敬)이라는시호가 내려졌다.
이 문집은 서문과발문, 부록 등이 없어서 문집의 발행사항은 알 수 없다. 시는경치와 계절에 아버지 한정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며 시사(時事)를다룬 것은 거의 없다. 그 중 「남유록(南遊錄)」은 영일현감(迎日縣監)으로있을 때 접왜사(接倭使)로서 경주, 동래 등지를 유람하며 지은 것이고, 「구절(九節)」․「칠곡(七曲)」은 대산서당의 주위 경관을 읊은 것이다. 그 밖에 자신의 감회를읊은 것과 선현(先賢)의 운을 따서 지은 것, 만시 등이 있다. 소(疏)의 「삼사형조참의잉진면군덕소(三辭刑曹參議仍陳勉君德疏)」는 형조참의를 사직하면서 올린 만언 소(萬言疏)로 입지(立志), 명리(明理), 거경(居敬), 체천(體天), 납간(納諫), 흥학(興學), 용인(用人), 애민(愛民), 상검(尙儉) 9조목의 군덕을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750여 편에 달하는서한 (書翰)은 문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학문적인 내용이대부분으로 선배나 동료들과 의견을 교환한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것이다. 그 가운데 이기(理氣)의 선후를 논변한 「답권 청대(答權淸臺)」, 경학과 성리학의 관계를 논한 「답권강좌(答權江左)」, 태극도(太極圖)에 관한 논변을 담은 「답이천유(答李天牖)」, 인(仁)에 대해 논한 「답김퇴보(答金退甫)」, 왕도와 패도에 관하여 논한 「여김광천(與金光天)」 등이 그의 사상적 터전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잡저는 저자의 사상을 이루는 골간으로 특히 「솔성지위도설(率性之謂道說)」․「일성구사덕 설(一性具四德說)」․「이기동정설(理氣動靜說)」․「이기선후설(理氣先後說)」․「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에는 성리학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황을 계승, 존리적(存理的)인 견지에서 인성론(人性論)을해명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는주자와 퇴계서를 탐독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수신과 제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항목을 골라서 적은 것이고, 「과거사의(科擧私議)」에서는 당시 과거제도 의 폐단을 역술(歷述)하고 그것의 제거 책을 진술한 것이다. 과거의 폐지를 주장하지 않고 경전(經傳)의 기송(記誦)이나 형식문장(形式文章)의 제작(製作)을 반대하고 문의(文義)의체득과 의리의 발명을 주로 하여 고시를 실시하자는 것이다. 약4,000자에 달하는 장문이다.
「국휼복제화의(國恤服制和議)」는국상(國喪)에 임하는 신서(臣庶)의 예절을 각종 예서(禮書)와전례를 인용, 검토하여 조절을 시도한 것이다. 이상정은 타인의문집과 저술에 서(序)․발(跋)을 많이 쓴 인물의 하나로 평설(評說)은 포양(褒揚)을 주로한 것이기는 하나 시문의 비평에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